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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기업에서 항상 입에 오르내리는 사례, 아타리 쇼크 본문
아타리 쇼크는 1983년부터 1985년까지 나타난 북미 비디오 게임 산업계의 대규모 경기침체 사건을 말한다. 1982년까지만 해도 30억 달러까지 간 게임 시장 규모가 크리스마스 시즌 직후 부터 3년만에 1억 달러(당시 약 3%) 수준으로 떨어지게 된 사건이다.
게임 시장에서 마구잡이로 생산해내는 저품질 게임의 소프트웨어가 시장에 쏟아지는 것을 막지 못해 유저들이 게임 시장으로부터 외면하게 된 사건으로 꼽힌다.
하지만 이러한 아타리 쇼크의 내막이라 불리는 위 내용은 생각보다 더욱 복잡하고 장기간에 걸쳐 나타난 것이며, "저품질 게임이 쏟아져서"라는 것은 일부에 불과하다.
의외로 이 사건은 조금 시간이 지난 1989년이 되어서야 지칭하기 시작한 용어이다.
좋지 않다는 시선과 달리 사실 아타리 쇼크는 사명을 아타리게임즈로 바꾸었고 '마블·매드니스'나 '건틀릿'과 같은 히트작을 계속 내놓고 있었다.
'아타리 쇼크'란 용어는 1989년에 벌어진 아타리와 닌텐도의 '고소 싸움'에 의해 만들어졌다.
아타리 쇼크의 원인은 크게 몇가지를 추려볼 수 있다.
1. 당시 플랫폼이라는 개념이 없었다.
2. 1983년 이후 컬러 타이틀이 출시되지 않았다.
3. 가정용 비디오 게임기 시장의 공급이 과잉(사용자가 따라 갈 수 없을 정도의)
4. 차세대 기기의 한발 늦은 등장
5. 코모도스64, 애플II 등의 성장으로 가정용 컴퓨터가 한창 도입되기 시작
6. '팩맨'과 'E.T' 등의 실패로 아타리 사의 적자
이렇게 보면 단순 비디오 게임 시장의 공급 과잉이 모든 이유가 되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모든 일들이 동시 다발적으로 나타났고, 아타리 사는 이 큰 위기를 극복하지 못했던 것이다. 게다가 게임 시장에서 골칫거리가 되는 닌텐도까지 아타리를 크게 압박했디.
그나마 소프트웨어 쪽에서는 판매 실적이 늘었다. 아타리를 큰 위기로 몰았던 것은 하드웨어였다.
여기서 가장 눈여겨 볼만한 것은 플랫폼 문제 부분이다.
아타리VCS 시절에는 지금의 XBOX나 애플스토어, 스팀(Steam) 등과 같은 플랫폼 개념이 없었다. 아타리의 형식적 승인만으로 누구나 게임을 만들 수 있었고, 발매일 조절이나 공급량 조절, 그리고 마케팅이나 검수 등 서포트 업무를 하지 않았다.
이 때문에 게임의 질이 떨어지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했으며, 잘 팔리지 않은 게임들은 시간이 지날 수록 재고가 쌓임과 함께 압박 아닌 압박을 지니게 된다.
이는 1982년 12월 소비자들이 아타리 게임이 재미 없다는 이유로 고소하는 사태가 생길 정도.
다음으로는 시장 공급 과잉에 따른 미래 계획이다.
사실 1980년대 초반의 미국은 지금처럼 인터넷이 활발하지 않았기에 유통망 또한 크게 발전하지 않았다. 재고가 떨어지면 곧바로 재입고가 불가능했다는 것. 그래서 대형 소매점들은 분기마다 혹은 1년치 재고를 쌓아놓고 판매하는 방식을 선호했다. 당시 마케팅이나 경영을 하기 위해서는 기존의 데이터를 가지고 하는 부분이 많았는데, 1982년 아타리 쇼크가 본격적으로 시작되는 크리스마스 시즌에 판매 예측량을 터무니 없이 높게 잡아버린 것이다.
하지만 크리스마스의 결과는 너무나도 처참했다. 실제로 예상한 만큼 하드웨어가 팔리지 않았던 것은 물론, 이미 대부분의 가정이 아타리VCS를 구매한 상태였기 때문에 소비자 입장에서는 굳이 2개 이상을 구매할 필요가 없었기에 재고가 쌓일 수 밖에 없었다.
한 때 너도나도 입에서 오르내리던 아타리였지만, 지금은 기억 속에서 잊혀지기 쉬운 역사가 되었다.
아타리 쇼크는 아직 오프라인성 게임 시장이 활발한 일본 속에서 기업들에게 늘 많은 교훈이 된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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